흑임자떡

직원이 맛보라고 종이컵에 흑임자떡을 몇 조각 넣어 가지고 왔다. 뭔 일이 있냐고 물으니, 어제 시장에 갔다가 눈에 띄어 샀단다.
일과 중에 간혹 간식으로 이것저것 먹기도 하지만, 떡은 오랜만이다. 흑임자 깨가루를 묻힌 떡이 쫄깃쫄깃하니 씹는 맛도 있기도 하다.
같이 일하는 간호인력이 젊은 사람들이라 다양한 군것질 거리를 가지고 온다. 빵, 사탕, 쫀드기, 말린 바나나 과자, 등등.
특히 친정이 군산인 간호사는 한번씩 친정 나들이를 한 다음날 출근할 때면 홍어 무침을 가져오곤 한다. 그러면, 그날 점심은 수술방 직원 전부 식당으로 올라가서 반찬으로 홍어 무침을 즐긴다. 홍어 무침은 냄새가 나지 않아 싹힌 홍어를 싫어하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
때로는 계절별 과일도 먹기는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간식거리를 들고 오는 것을 보면, 우리 주변에 먹을 것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람들 사이에 별 친분이 없거나 얼굴은 알아도 한 장소에 같이 근무를 할 때면 분위기가 서먹하거나 정적이 흐르는 어색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가벼운 이야기나 간식거리를 나누는 것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좋다. 대체로 직장 이야기보다는 가벼운 일상적인 주변 이야기가 편하다. 이런 것을 '스몰 토크'라고 한다지?
오늘 가져다 준 흑임자떡을 보니, 아마 3년 전 이맘 때에도 흑임자떡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어째 기억하냐고? 그때 에피소드가 있어서 내가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에도 흑임자떡을 먹던 도중이라 자연스럽게 스몰 토크 중에 흑임자떡이 주제가 된 것이다. 그때 간호 실습나온 간호 학원생이 같이 있었는데, 수술방의 분위기가 일반 병동과는 많이 다르고 참관하는 수술이라는 것들이 피가 흐르는 것들이라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것질 거리로 누군가가 내놓은 흑임자떡과 커피를 마시던 도중에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내가 흑임자떡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떡 이름이 왜 흑임자떡이지?''
''떡고물이 흑임자 가루 잖아요.''
간호사 누군가가 댓구를 했다.
''흑임자떡 명칭의 유래를 모르는 구나.''
''그런게 있어요?''
''흐음, 가르쳐주까?''
... 옛날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지. 먹고 살기 위해 남편은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고 몇 줌 안되는 곡식을 삯으로 받아 가족들 목에 거미줄을 걷어 내는 것이 고작이었지. 아내는 밤낮으로 바느질감을 가져와 품삯으로 생계에 보탬을 했었고. 간혹 부자집 잔치가 있으면, 손을 보태러 가서 야무지게 일을 해 주고는 집으로 돌아 올 때, 잔치 음식을 푸짐하게 얻어와서 온 식구가 배불리 먹는 것이 낙이었지...
...어느 해 가뭄이 심하게 들어 추수량도 얼마되질 않아 이후 몇년 간은 동네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이 어렵게 되었는데, 그 여파로 이 부부가 노력을 해도 삯은 점차 적어졌었고, 얘들 챙겨 먹이는 것도 힘들게 되었지.
...하루는 옆집 여편네가 친척의 잔치에 손을 빌려 주려 이웃 마을에 가는 길이라면서 일손이 매운 부인에게 같이 가자고 했네. 부인은 당연히 길을 따라 나섰지. 다들 어려운 시기이지만, 그날 잔치는 거창했다네. 부인은 이런저런 맛난 음식을 지지고 볶으며 일을 하면서도 빨리 잔치 음식을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에게 먹일 생각 뿐이었지. 그런데, 하필 잔치도 늦게 마치고, 이웃 동네라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늦은 시간이 되었지. 집안에는 기다리다가 잠이든 아이들과 마루에 걸터 앉아 부인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남편은 냉수 사발을 들이키고 있었다네. 부인은 자는 아이들을 그냥 두고, 마루에 그대로 앉아 남편 앞에 얼른 음식 보자기를 풀어, 손으로 맛난 것을 골라 남편 입에 넣어 주었지. 오랫동안 부실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남편은 기름지고 맛난 음식이 입으로 들어오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 된 거야. 한동안 허겁지급 먹던 남편이 맞은 편에 앉은 부인을 보니, 부인은 남편 앞에 음식을 발라 놓기 바빴지, 정작 자신은 음식을 먹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눈물 젖은 음식을 혼자 먹을 수 없어 자신의 입에 넣으려던 떡을 부인에게 먹이려고 울면서 건냈지.
''(훌쩍훌쩍)흑흑... 임자... 떡 좀 먹어 봐.''
그렇게 남편이 손으로 집어 입에 넣어 준 떡이 어찌나 맛났던지, 부인은 베시시 웃으며 말했지. ''아유 정말 떡이 맛나네요.''
....다음날 아침에 애들이 일어나 참새떼처럼 입을 열기 시작하는거야.
''맛있는 흑임자떡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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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아는 간호사는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줄 잘 알기 때문에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그냥 피식 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실습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그래서 흑임자떡 이름이 그렇게 해서 생긴거예요? 진짜예요?''
그날 수술방에 처음 참관 온 실습 학생은 순박했다.
우연인지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그날 이후 며칠 지나고 나서 학원 실습생 파견이 없어졌었다. 내가 쓸데없이 실습 학생을 놀린 것이 학원장 귀에 들어 갔었나?
최근 몇 달 전부터 학생 실습이 재개 되었고, 오늘 군것질 시간에 실습 학생도 함께 흑임자떡를 먹었다. 하지만 '흑임자떡의 유래'에 대해서 학생에게 말하지 않았다. 또 실습생 파견이 우연히 끊어질까봐 쓸데없는 소리는 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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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임자떡 번외편:
부부가 서로 음식을 권하며 알콩달콩거리다가, 부인이 잔치집에서 가져온 술병을 꺼냈다. 잔치집 노인의 자식들이 만수무강을 빌면서 올린 복분자 술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찬모에게 부탁하여 몇 모금 얻어 온 것이다. 술을 곁드린 기름진 음식에 둘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러다가 기름진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자 메말랐던 몸에 물이 오르는 듯했고 복분자로 취기마저 돌자 쏫아 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 하고 급기야 둘은 떡을...
...밤새 엄마가 떡을 먹으며 기쁜 숨을 내 쉬는 것을 들은 애들은 맛있는 떡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아침에 아이들이 밤새 참았던 흑임자떡을 찾을 때, 머리까진 맏이는 한 숨을 쉬었다. 그동안 동생들 챙기느라 힘들었는데, 또 동생이 생길 판이라 여간 짜증나는 것이 아니었다.
... 이날 이후 그 동네에는, 비가 와서 바깥 일을 못하는 날이던가, 너무 추운 날이던가, 아니면 심심한 날에는, 아낙이 흑임자떡 한 접시와 복분자 술 한 병을 들고 서방 옆에 앉는다나 어쩐다나 하는 전설(거짓말)이 전해져 온다.
흑임자와 복분자가 남자 몸에 좋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