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跪九叩頭禮
우리나라 역사 드라마 중에서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을 연결하면, 의례이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혹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고
하는 것을 다루는데,
이것은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 행위로 전해지고 있다.
궤(跪): 꿇어 앉을 궤
고(叩): 두드릴 고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의 왕이
적국의 왕에게 땅 바닥에 머리를 찍어가며
항복를 표현한 것이라
굴욕적인 행위 중 대표적인 사례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한번 무릎을 꿇어 땅에 머리를 세번 찍고,
그러한 행위를 세 차례나 하는 것으로
이마에 흐르는 피,
땅에 찍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리도록 한 행위 등을 언급하면,
전해들은 당시의 백성들이나
후세의 자손들은
피가 끓을었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자면,
이 삼궤구고두례에 대해
위키백과 검색에서는,
명나라 때는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예법으로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를 실시했으며,
청나라 때 삼궤구고두례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선 왕이 신하로서,
청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방법으로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한 것은
청나라 입장에서는 승자로써
당연한 요구였을 것이다.
두드릴 고(叩)의 의미 때문에,
머리를 땅에 찍었다고 표현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머리를 땅에 닿을 듯한
조아림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들 있다.
그리고, 피가 나도록 찍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고 한다.
어쨋거나, 한 나라의 왕이
항복 행위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치욕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요구로
남한 산성에서 두 달간 항전 후
산성에서 나와
한강변 삼밭나루터(三田渡)까지 나아가
항복한 그 과정을 기록한 기념비를
항복한 곳에 세웠다.
전면에 만주어와 몽고어,
후면은 한자로 기록하였다.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청태종공덕비
간략하게 삼전도비
이 삼전도비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땅에 묻혔다가, 다시 세워지는 등,
풍파를 격다가,
패배한 수치스런 역사도
기억해야 할 역사라고 하여,
원래 자리에 가장 근접한 곳인
송파구 석촌호수 서호 인근에
안치해 놓았다.
삼밭나루터(三田渡)는
훗날 주위가 매립되면서
지류가 육지화 되면서 사라졌고,
석촌호수는
그 한강지류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라를 망치는 것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이 없는
국왕과 백면서생 관리들이
국정을 명분과 입으로만 한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명분에 반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눈을 뜨게 된다.
남한산성 남문에서 시작하는
제 1코스를 따라 걷다보면,
서문쯤에서 멀리 바라보는 풍경에
우뚝 쏟은 롯데타워가 한강을 배경으로
보인다.
삼전도비가 저곳에 있다.
삼궤구고두례를 한 인조의 눈에는
삼전도비가 그렇게 크게 보일 것이다.
내년 청와대 마당에는 어떤 기념비가 세워질까?
시진핑 방문 기념비
다시 찾은 자유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