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물한 기억의 편린을 찾아서 III

夢乭 2014. 8. 3. 20:12

 

 

  돌이켜 보면 난 자랄 때 형을 많이 쫒아 다녔다. 2 살 터울이라 많은 세월을 같이 보냈다. 그래서 같이 공유한 추억이 많을 것이다. 내게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또렷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어릴적 할아버지 댁의 여름 추억이다. 아마 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창원군 동면 신방리가 원적지이지만, 서류상 적는 고향 주소이고, 창원군 덕산 모암 마을이 내가 아는 고향이다. 그곳에서 자라다가 3 살 때에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왔으니, 고향 덕산 모암 마을의 기억이 거의 없다. 무의식에는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로, 간혹 꿈에 본듯한 느낌으로, 할아버지가 사시던 댁의 풍경이 사진처럼 연결된 채로 움짤거린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부산에서 살다가, 간혹 가는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가족 나들이가 인상적이다. 대략 국민학교 입학 전의 나이로 추정될 뿐이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학교 입학 전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7 살 가량 되겠다. 우물 옆 조그만 물 웅덩이에서 발가벗고 물장난하다 머리 위의 철사 거물망에 엉긴 청포도를 따먹고 입이 시려 몸을 떠는 장면이 기억나는 걸로 보아, 계절적으로는 초 여름이지 싶다. 아마 아버지의 여름 휴가가 그 때가 아니었을까?

 

 

                     I

 

  단감으로 유명한 진영에서 두어 정거장을 지나 덕산에서 시외 버스를 내려, 좌우로 좀 번잡스럽게 느껴지는 경사진 대로를 조금만 내려 가면 길은 끝나고 철길이 가로막아 선다. 차단기없는 철길 건널목 너머 녹색 물결은 멀리 마주 보는 산 어름까지 깔려 있고, 살랑살랑 주름잡히다 펴지고 다시 너울진다. 아직 여물지 않은 벼가 넓은 논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자 마자, 짧은 가파른 내리막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논을 빙 둘러가는 비포장 길이 철길따라 좌우로 뻗어 있다. 왼쪽 방향으로 길을 잡고 나서면, 다시 저만치 끝에서 길은 오른쪽으로 휘어져 논으로 숨듯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 길을 아버지가 앞서고, 또 그 뒤를 어머니가 아버지 왼편으로 붙어 쫒아가고, 형과 내가 먼지 폴폴 날리는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다 걷다 한다. 간혹 지나가는 버스가 있어면 옆으로 비켜나 입을 가리고 먼지를 피하곤 했다. 아마 하루 두세번 다니는 군내 버스이리라.

  어린 내 다리가 좀 아플 쯤, 조금 경사진 오르막이 나타나고, 그 길은 왼쪽으로 다시 급격히 휘어져 내려간다. 멀리 진행 방향의 정면에 아름드리 큰 고목이 시커먼 색을 띄고 서있는데, 길은 고목을 피하고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고목은 하늘을 향해 커다란 팔과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쭉쭉 뻗어 있고, 아래쪽 굵은 가지들은 왠만한 나무 둥치 만한데 마치 땅에 닿을 듯 하다. 주변은 넓은 공터처럼 비어있고, 공터의 가장자리는 어른 키만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다. 내 기억에는 고목에는 나무잎이 없다. 그 나무 앞과 크다란 바위 옆에서 찍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흑백사진들을 순간적으로 떠 오른다. 어릴 때 아버지의 사진 앨범을 넘기다 그 사진이 나오면, 어린 마음에 사진 속 할아버지의 모습이 무서워 눈을 감고 후닥 다음 페이지로 넘기곤 했다.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고목을 배경으로 한 단체 사진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흰 한복에 갓을 쓰고 계시고, 얼굴에는 눈이 보이지 않게 시꺼먼 둥근 딱지를 붙이고 계셨다. 그 사진 속의 나무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것이다. 길이 그 나무의 경계를 넘어서자, 다시 내리막 길을 이루면서 오른쪽으로 다시 휘어져 고목의 뒷편으로 돌아간다. 고목은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이었다.

  내려가는 길 왼편으로 몇 가구의 집이 모여 있고, 그 집들 사이에 조그만 공터가 있다. 길에서 공터로 들어가면, 정면에 보이는 집들 사이로 골목이 서너개가 뻗어져 나간다. 그 공터 한켠에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우물이 있다. 우물 옆에는 빨래판으로 쓰는지 낮고 납딱한 큰 돌이 물기에 반질 거린다. 바로 옆에는 어디로 흐르는지 모를 가느다란 냇물이 흐른다. 우물가의 빨랫물이나 구정물이 그 냇물로 흐르도록 우물가 한 귀퉁이가 내려 앉아 있는 것이다. 다시 그 우물을 기준으로 해서 왼쪽이 골목이면 오른쪽은 고목 뒤를 돌아가는 내리막길이다. 그 내리막이 잦아 들고 평편해지고 곧아지면서, 산자락을 타고 길게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완만하게 돌아간다. 이 길을 어른들은 '신작로'라고 불렀다.

  신작로 왼쪽은 산자락을 끼고있고, 오른쪽은 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그 길을 조금만 가면 오른편에 굵은 아름드리 나무가 있고, 그 나무 옆에 내리막으로 된 작은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내려다 보면 기와 지붕과 초가 지붕이 섞여 네모 반듯하게 이어져 있는 할아버지 댁의 지붕들이 눈아래에 들어오고, 신작로와 할아버지 댁 사이의 경사진 일직선의 좁다란 길을 가지 쳐 놓은 신작로는 가던 길 그대로 잠시 더 뻗었다가 뒷산에 부딪히자, 산자락을 따라 할아버지댁을 우측으로 돌아 감싸면서 산길처럼 대나무 숲으로 사라진다. 철도 건널목과 크다란 고목, 길가의 우물은 신작로를 따라가는 길 도중에 만나는 이정표였다.

  이 길은 할아버지가 시골 생활을 청산하시고 부산으로 이주하실 때까지 매년 명절이나 할아버지 생신 때 가족들이 가는 길인데, 계절별로 특별한 풍경을 펼쳐 보여 준다. 어떤 때는 하늘에 새떼가 날아가면 아버지께서 주남 저수지로 가는 청둥오리떼라고 말씀하시고 주변의 지명을 대며 위치를 말씀하였으나, 어린 내가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기억이 제대로 나지도 않는다. 후일 주남 저수지가 철새 도래지라고 신문에 크게 나고 처음으로 발견한 것을 자랑삼아 여기저기서 떠들 때, 난 웃었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저수지이고, 매년 다니던 철새떼를 이제야 발견한 양 호들갑을 떠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 이름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 모양이다.

 

 

                  II

 

  큰 길인 신작로에서 할아버지 댁으로 이어진 빨간 황토색의 좁다랗고 긴 길의 초입은 논을 가르고 지나다, 한 논두렁을 지나자 마자 길 왼편은 암청색의 벽과 접하게 되고, 길 왼편 논두렁과 벽사이에 구정물이 흐르는지 조그만 또랑이 있는데 그 또랑 끝은 길을 따라 간다. 암청색 벽의 개구멍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나와서 또랑으로 흐르고 있다. 집으로 가는 황갈색 길의 오른편은 넓은 평지이고, 왼편은 논과 대나무 숲과 산자락들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이어지고, 마침내 집뒤로 보이는 높은 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암청색 벽으로 보이는 울타리는 탱자나무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왼편으로 끼고 따라가면 그 끝에 대문이 나온다. 오른쪽은 넓은 논 때문에 탁 틔인 시야가 가슴을 부풀리게 하고, 먼 산이 흐리게 보일 정도다. 탱자나무 울타리 끝에 달린 문은 넓은 평야로 열려있다.

  과장을 하면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부터 할아버지 집까지 증조부의 땅을 밟고 왔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걸었던 길은 할아버지 땅이 아니었고 현재는 고향이라는 단어만 남아있다. 아직(글 쓴 당시 기준) 칠팔십대 토박이 어른들은 우리 집안 내력을 대략 안다. 길가 우물이 있는 동네는 허씨 집성촌이다. 지금은 세월이 더 흘렀기 때문에 어떨지 모르나, 22 년전에 내가 결혼 후 혼인신고 때문에 원적지인 동면에 갔을 때, 서류 상 문제로 대서소를 찾고 사정을 이야기하는 동안에 할아버지 이름이 나오자, 연세 지긋한 대서소 주인은 ''니가 허부자 둘째 아들 사욱이의 둘째냐? 너거 엄마는 연안 김씨고''라고 대뜸 말을 꺼내서 내가 오히려 놀랬다. 어려서 떠난 날 내 친계 족보로 알아보다니, 게다가 외가까지 입에 올리다니, 시골의 입은 어쭙쟎은 역사 기록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그리고 증조부는 악덕 지주는 아니었던 것 같아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대서소 주인은 근처 욱자 항렬을 가진 어른들이 많으니, 소개해 줄테니 인사나 하고 가라고 말씀하시고 서류를 잘 정리해 주셨다. 잠시 후 인근 금은방 주인이 아예 대서소로 오다가 밖으로 나오는 날 부르면서 "내가 허*욱인데 니 아제 뻘된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조심해서 가라고 한 말씀 후 손을 흔들며서 돌아서는 것이다.

 

 

             III

 

  대문은 네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채 초가 지붕을 가지고 있다. 나무 문은 안으로 열려 있으며 어린 내 눈에는 문턱이 높았던 것 같다. 전체적인 모양은 사천왕이 버티는 절 입구와 같은 구조다. 그 문의 왼편은 그냥 벽이고 오른편은 짚이 가득 쌓여 있다. 대문을 지나면 대략 사각형을 이루는 마당이 정면 왼편 대각으로 펼쳐진다. 대문이 사각형의 한 모퉁이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지나온 탱자나무 울타리가 길었던 이유다. 대문을 들어서고 마당한 가운데 서면, 정면은 기와를 얹은 본채이고, 오른쪽은 본채와 90 도 각도 꺽여진 채로 연결된 사랑채가 있는데, 유난히 댓돌이 높다. 사랑채와 대문사이에 큰 솥이 걸린 아궁이가 눈에 들어 온다. 옆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만든 여물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문의 오른편에 있는 짚단을 솥에 넣어 소 여물을 만들고, 여물이 만들어지면 여물통으로 옮겨 담게 되어 있다. 여물통 옆에 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없다. 내가 대문을 들어 설 때 소는 논일을 나가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 눈을 돌려 보니 대문 옆 짚단에 가려진 작두가 있다. 날은 서 있으나 몸체 대부분은 불그스레 녹이 묻어 있다. 크다란 벽돌같은 나무 토막 위에 작두가 고정되어 있고, 나무 손잡이는 반질반질하다.

  마당 한 가운데 서서 뒤돌아 보니 왼쪽에는 들어온 대문이 보이고, 대문에 붙은 채 오른쪽으로 이어진 2 칸짜리 문간방이 보인다. 조금전에 말한 대문의 왼편이 벽이라고 했지? 그 벽은 문간방의 벽이었던 것이다. 시야를 옮겨 문간방 쪽마루를 따라가면, 문간방 옆에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창고가 나타나는데, 바닥에는 짚이 흩어져 있고, 창고의 안쪽 깊숙한 곳에는 짚단이 산더미를 이룬다. 입구에는 농기구가 종류별로 벽에 매달려 있거나 기대어져 있는데, 한 뭉텅이로 몰아 놓아 뭐가 뭔지 구별할 수 없다. 창고를 90 도로 꺽어 연장시킨 외양간이 자리하고 있고, 바로 지붕이 연이어 이어진 초가 지붕을 가진 광이 있는데, 문은 단단해 보이고 쇠 자물쇄로 채워져 있다. 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그 광 안에는 증조부의 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말들어보니 두 사람이 앞뒤로 매는 이인교이다. 증조부는 나들이 할 때 가마를 탔었다. 지금 부자들은 벤즈를 타나? 광과 본채 사이에 조그만한 우물과, 샘인지 모를 시멘트로 만든 사각형의 물 구덩이가 있고, 물 구덩이에서 흘러 넘치는 물은 바로 옆의 탱자나무 울타리의 개구멍으로 빠져 나간다. 신작로에서 빠져 내려가는 좁은 황토색 내리막길을 따라 오다 본 그 개구멍이다. 그 물 구덩이 주위에 대나무로 만든 네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들 위에 철사로 만든 망이 지붕처럼 있으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줄기와 잎사귀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그 줄기가 철사망을 감아가면서 물 구덩이 위에 도달하면, 그 끝에 청포도가 매달려 있는 것이다.

 

 

                 IV

 

  본채는 높은 축대 위에 있고, 한 가운데 댓돌이 2 층으로 있어, 계단처럼 오르게 된다. 정면에서 보면 왼편에 '정지이'나 '정지'라고 부르는 부엌이 있는데, 올라간 축대만큼 부엌의 바닥이 내려 앉아 있다. 본채는 대청 마루를 중심으로 보면, 왼편은 정지이고, 가운데는 안방인데, 대청 마루에서 보면, 안방의 뒷켠에 후원으로 뚫린 쪽문이 있다. 안방문과 쪽문을 연다면 마루에서 후원이 바로 보이게 된다. 마루의 오른편은 건너방이라 하는데, 특별히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지 기억이 없다. 나중에 삼촌이 결혼하고 그 방에서 살았다는 것만 기억된다.

  특이하게 생각나는 것은 부엌의 구조다. 본채를 지탱하는 축대를 올라서면, 왼편에 부엌 입구가 있는데, 문은 있으나 항상 안쪽으로 열려 있으며, 맞은 편 벽에는 후원으로 열리는 부엌 문이 또 있다. 왼편 벽은 황토색으로 흙벽이고, 검탱이 얼룩이 세월의 뚜께만큼 덕지덕지 있다. 부엌 문과 왼쪽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짚단이 수북이 쌓여 있다. 아궁이 앞에 앉아서 오른손을 뒤로 살짝 뻗으면 짚단을 한 웅큼 쥘 수 있다. 아궁이 입구와 짚단 더미가 짚단 가닥으로 연결되면 큰일난다. 아궁이 불이 짚단 더미로 옮겨 붙을 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불씨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씨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불을 주의 깊게 다루라는 뜻으로 보인다. 짚단이 도처에 늘려있고 초가 지붕이면, 불씨가 조그만하게 작아도 또는 멀리서 날아 와도 초가 집은 잿더미로 변한다.

  다시 부엌 바닥을 살펴보자. 부엌 문지방을 넘어 서면, 축대 높이 만큼이나 내려 앉은 바닥이 까만 색으로 나타난다. 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데 까맣다. 흙인데 까맣다. 어두워서 그럴게 보일수도 있고, 움푹 내려 앉아서 그렇게 무섭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부엌과 안방이 만나는 방향에는 무쇠솥이 걸린 큰 아궁이가 있는데, 그 폭이 무쇠솥보다 조금 크지만, 길이는 안방의 옆면과 마루를 연결한 길이가 되는데, 솥이 걸린 부분은 불을 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용도가 희한하였다. 아궁이가 안방의 가운데 위치하게 되므로, 부엌에서 보면 아궁이는 왼쪽으로 치우치고, 오른쪽은 넓은 공간을 내어 준다. 이 공간을 '부뚜막'이라고 기억한다. 이 공간이 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다용도 씽크대로 쓰이기도하고, 쪽문을 드나드는 계단 역할도 한다. 도마를 올려 조리대로도 사용하는데 문제없다. 겨울철에는 엉덩이를 올려 놓으면 아궁이 열기로 온 몸이 녹는 듯 할것이다. 일단 그 공간과 연결된 벽에 조그마한 쪽문이 두 개가 달려 있다. 사람이 들고날 수 있지만 용도는 사람이 들락거리는 것은 아니다. 덩치 작은 아이나 아녀자들이 허리를 웅크리고 지나갈 정도라면 딱 맞다. 일단 부엌에서 보는 왼쪽 쪽문은 안방 용이다. 그럼 당연히 오른쪽은 대청 마루 용인 것이다.

  사용 방법을 설명할테니 머리에 그림을 그려보자. 무쇠솥에서 주걱으로 밥을 퍼서 그릇에 담고, 그 그릇을 쪽문들 바로 아래에 놓아둔 부뚜막 위의 개다리 소반에 올린다. 반찬은 이미 찬장에서 꺼내어 준비된 상태다. 왼쪽 문을 열면 안방이므로 밥상이 안방으로 들어간다. 오른쪽 문을 열면 밥상이 대청 마루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문들의 경계는 안방과 대청 마루를 경계지르는 문지방 뚜께다. 마당에서 놀다가 어른들이 점심 식사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독상으로 받으시고, 아버지와 삼촌은 대청 마루에서 밥상을 받으시는데, 어머니나 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오지 않고 쪽문으로 밥상을 들여 놓는다. 어른들이 식사를 다 하고, 밥상을 쪽문으로 물려 놓으면, 부엌에서 쪽문을 통해 손이 나와 밥상을 낸다, 즉 거둬 들이는 것이다.

  이제 쪼르르 부엌 문으로 달려가 부엌 안쪽을 살펴보자. 어느새 개다리 소반은 부엌 한쪽에 걸려있고, 부뚜막에는 조금 전의 반찬이 놓여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바닥에 놓인 짚을 깔고 앉아서, 왼손에 밥그릇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같이 쥐고,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에 넣은 후 숟가락을 다시 그릇에 얹어 놓고 오른손에 접어 쥔 젓가락을 제대로 잡아 반찬을 집는다. 간단히 먹는 점심인 경우 대개 이렇게 때운다.

  아침 저녁은 안방이나 마루에서 먹게 되는데, 할아버지는 언제나  안방에서 독상을 받으시고, 남자 어른들은 한상에 같이 밥을 올려 겸상으로 먹으며, 애들은 따로 모여 여자 어른들과 먹게 된다. 그러나 남자 어른이나 어린애들은 밥상위에 밥그릇을 올리지만, 할머니를 포함한 여자 어른들은 밥상 모서리에 앉아 밥그릇을 바닥에 내리고 먹는다. 추운 겨울에 모두 안방에서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겨울에 사람이 많아 방이 좁을 경우 여자들은 남자들이나 애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을 부엌으로 내려 따뜻한 아궁이 옆에 놓고 부뚜막에 걸터 앉거나, 바닥에 짚을 깔고 앉아 먹는다. 이것들이 내가 아주 어릴 때 머리에 새겨진 그림이다.

 

 

                       V

 

  그리고 후원을 말하자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원에는 장독대가 있었는데 그다지 크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후원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내가 후원을 무서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원에는 장독대 말고도 대나무 숲이 있었다. 그리고 대나무 숲 뒤는 절개지로 높다란 축대가 담처럼 있고, 축대는 집뒤를 지나는 신작로와 경계를 이룬다. 이 축대와 본채 사이에 대나무 숲이 있는 것이다.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도 바람에 우는 대나무 소리와 대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무서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방안의 요강이 이럴 땐 요긴하지만, 참다가 잠들고 잠결에 소변을 지리곤 했다. 기억에 없으나 고모나 주위 어른들이 날 오줌싸개라고 놀리는 말을 했단다. 그리고 부산으로 나온 이후에도 간간히 할아버지 댁에 가면, 다음날 아침에 이불을 흥건히 만든 나를 작은 고모가 나무라며 엉덩짝을 찰싹찰싹 때리는 것이다. 키는 쓰 본 기억이 없으나, 오줌싸개라는 별명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마 대나무숲의 저주가 있어서 그랬을까, 지금도 검도장에서 죽도로 머리와 손목, 허리를 맞고 있다. 간혹 목찌름도.

  'ㅁ'자 형 한옥은 중부 지방 형태로 고등학교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다. 남부 지방은 일자 형이나 'ㄱ'자 형이라고 배웠었다. 할아버지 집 구조가 말하는 것은 주인이 중부 지방에서 남부 지방으로 이주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양천 허씨는 강릉이 그 기원이란다. 원래 김수로왕의 30 세손인 김선문 종정이 왕건을 도와준 일로, 새로운 성씨을 하사받아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우리 집안이 언제부터 창원 지역에 뿌리를 내렸는지는 모른다. 큰어머니의 말씀으로는 시집 올때 집이 좀 더 북쪽에 있는 용등('용띠이'라 발음하셨음)에 있었다고 한다. 6.25 난리 전에 그 동네에서 좌익들이 난동을 심하게 부려서, 할아버지께서 현재의 덕산 모암 마을로 이사를 하셨다. 집을 통째로 뜯어서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증조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양반이 해야 할 글공부를 내치고 농사일을 하며 재산을 모았다. 후일 들어보니 흉년에도 수확을 할 수 있는 구황식물인 조나 수수 등을 버려진 강변에서 홀로 경작하여,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 축재를 이렇게 시작하게 되는데, 역시 농사도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 따라 특수 작물을 해야 남들보다 경쟁력이 앞섬을 알 수 있다. 선경지명은 필요에 따라 생기며 생각해 보면 간단할 수도 있으나, 그러한 것이 결과에 천양지차로 영향을 미친다. 결국 증조부는 땅을 넓히고 가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해방 후 자유당 시절 토지 개혁으로 토지를 몰수(유상몰수?) 당하고, 모든 농토를 소작농들에게 나뉘게 된 뒤에도, 땅에 대해 집착이 강한 증조부는 그 넓은 땅을 다시 소작농들에게서 되사들였다. 그 땅이 할아버지 대에서 조금씩 없어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독자로 귀하게 자라면서 경제 활동과 관계없는 한학 공부만 했다. 인근의 이름난 선생을 독선생으로 모시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현대화 되면서 한학은 죽은 학문이 되었다. 경제적 개념이 없으신 할아버지는 자식 공부에 필요한 돈을 땅을 팔아가며 시켜셨다. 그 당시 대학을 3 형제나 보냈으니, 한 명 대학 보낼 때마다 땅을 팔았었던 것이다. 이외 여러 상황이 재산을 깕아 먹었다. 하루아침에 망한 것은 아니었다. 야금야금 분해되어 나갔다. 가세가 서서히 기울어 갔다.

  할아버지가 시골을 청산하시고, 부산 당감동 큰댁에 계실 때, 국민학생인 형님과 난 새벽에 큰댁으로 찾아가 할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천자문을 배워야 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작은 아버지가 렇게 했다는 이유다. 어려운 한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천자문도 못 뗐다.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천자문 공부를 중단했다. '하늘~천, 따~지, 가물~현, 누루~황, 집~우, 집~주, 너블~홍, 거칠~황'

 

 

 

                       VI-I

 

  참 사랑방을 빼 먹었네. 사랑방은 잘 기억이 안난다. 문틈으로 살짝 본 것 뿐이다. 사랑방은 사랑채의 일부로서 옆에 창고 같은 공간이 있다. 겉에서 보기에는 한 채처럼 보이나, 방 안쪽에 경계를 지우는 미닫이문이 있다. 책이나 잡다한 성인 남자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있었을 것이다. 손자들이 좋아하는 꿀단지도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밤에는 안방에서 주무셨다. 옛날 어른들은 주로 사랑방에서 낮밤으로 자고 공부하곤 했단다.

 

주: 사랑방 []

형태분석 : [+{한국 한자}舍廊+房]

명사】한옥에서, 집의 안채와 떨어져 있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방.

참고어 사랑 2 (舍廊) , 사랑채 (舍廊-)

 

 
 

 

                      VI-II

 

  간혹 둘째 부인이 있으면 첩이라고들 남들은 부르지만, 집안에서는 무슨 무슨 댁이라고 불렀으며, 대개 시집올 때 친정집의 동네 이름을 붙여 불렀다. '택호'라고 했다. 이 택호는 본처의 자식들도 그냥 불렀다고 한다. 엄연히 아버지의 여자 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다. 말은 하대를 한다. 즉 말을 놓는다는 것으로 신분상의 차이를 표시하는 것이다. 양반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첩의 자식은 대개 본처의 자식과 한 집에서 키우지 않는다. 첩의 친정에서 키운다고 들었다. 맞는지 틀리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 집안만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증조부께서 둘째 부인을 두셨다. 본처와 첩의 관계는 요란하지 않게 지냈으나, 할아버지는 당신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자랐기 때문인지 성인이 되자 둘째 부인과 배다른 형제들을 냉담하게 대했다. 독자인 할아버지는 외로울 수 있었으나, 돌아가실 때까지 왕래가 없었고, 족보 문제나 집안 행사에 대해 일이 있으면, 애둘러 피하시고 만나 주지 않으셨다. 끝까지 둘째 부인을 택호로 불렀으며, 명절이나 생신에도 마주치는 일이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어른들이 입에 올리지 않아 모르고 지내다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수 년에 걸쳐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종합하여 내가 혼자 정리해본 것이다. 내가 오해하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차후 친인척들의 말씀을 재차 들어 볼 생각이다.

  또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둘째 부인 즉 내게는 말로만 증조모님되시는 분은 내가 대학생 때까지 살아계셨다.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증조부에게 후처로 들어 온 것이다. 나도 자랄 때 부터 '**할매'로 불렀지 친할머니처럼 '할머니'라고 불러 본 적없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호칭을 그렇게 하도록 시켜 별의미없이 입에 붙은 호칭이었다. 그리고 증조할머니는 언제 부산으로 이주하셨는지 모른다. 당시 그다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사셨는데, 그 당시 몸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 마실을 잘 안 다녔었다. 그러나 다른 친척집에 비해 우리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어느날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꺽어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 오셔서, 이마에 손을 얹어 보고 걱정하고 덕담해 주셨다.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새벽 몸을 딱으시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쪽을 지셨다. 나는 그분이 양장을 한 것을 본적이 없다. 집에서나 나들이 때에도 항상 한복을 입으셨다. 97세에 돌아가셨는데 정신을 잃지 않고 지내시다, 미국으로 이민간 셋째 아들을 찾아 가셨다가 현지에서 돌아가셨다. 떨어져 살던 아들 품에서 영면하신 것이다.

  증조모께서는 젊은 시절 하얀 얼굴에 미인이었다고 들었다. 그것 만이 아니다. 소리를 잘 하셨다. 내가 고등학생 이후 간혹 찾아가서 소리를 가려쳐 달라고 부탁드리면, 손사래치며 주름진 얼굴의 입가에 주름이 더해지곤 했다. 대신 장구치는 법을 여러 차례 가려쳐 주셨는데, 매번 내 손이 박자를 못 따라가 내가 금새 포기하고 말았다. 그랬던 분이 어느 한 여름밤에 친척들과 함께 우리집에 놀러 오셨다가 소리를 하신 것이다. 형님이 당시 유행하던 카세트 테입 녹음기를 틀어 소리를 저장하는 것을 보자, 신기해 하시며 그날 갑자기 소리를 남기겠다는 것이다. 몸은 가도 소리를 남기고 싶은신가.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읆조리듯 나즉이 소리를 이어나간다. 중간중간 소리를 높여 끌어 올리기도 한다. 추임이 없으면 혼자서  '엇^차~ 차^~아_~암^;  좋_다~'라는 추임까지 하신다. 무려 40 분을 부르셨다. 중간 중간에 물 마시는 것 말고는 지친 기색이 없었고 쉬지 않으셨다. 첫곡은 '청^~산리~_  벼^억~계-수야~_   쉬~이^~감-을~_  자라아^앙~마라~ ........' 처음으로 내가 들은 정식 소리를 낸 것으로 기억되는 부분은 여기까지이고, 40 분 동안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중간에 '낙^;양^-성~^;  십^;리^-하에_   높^;고^ 낮은_~ 저 무_~덤^은-  영_;웅^;  호^;걸^이_~ 몇^;몇이냐~_    절^; 세^가^;인이-그^;누구냐~  이^; 내_~인^;생~  한^번^-~가면- 다_;시^; 오^;지^를_~ 안^노나니_   에^--라-~ 만^~수~~~~  에^;라~_  대-신^; 이여~~~~~'라는 소리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소리라 기억에 남는다. 교과서에는 악보로 나와 있었으나 난 이 소리를 그냥 귀로만 자주 듣고 소리를 읊었다. 그러나 지금 글은 내가 기억하고 여러번 들었던 곡으로 뜻은 모르고 들리는 대로, 그리고 기억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기호는 내 맘대로 한 것이니 특별한 뜻은 없다. 아쉽게도 녹음 테이프는 녹음한지 몇 년 후 분실하고 말았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소리하시는 모습을 돌이켜 보면, 다리를 꼬아 앉아 자리를 잡으시는데, 왼 무릎은 접고 오른 무릎은 세워서 양 손을 오른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허리를 마치 젊은이처럼 꼿꼿하게 하셨다. 평소 허리를 굽히고 지팡이를 짚으시던 모습은 사라지고, 반듯한 자세로 앉은 모습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여름 밤 마당 평상 위에 여남은 친척들이 둘러 앉고, 그 가운데에 앉아서 소리를 하실 때, 마루의 백열등이 조명을 대신하고, 밤 더위의 열기 속에서 나즉이 소리하시는 동안, 주름진 얼굴에 서린 처연함이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정면을 보는 눈은 반쯤 내려 감은 듯하나 깜박임 조차 없었다. 소리를 배로 내는가? 모르겠다. 90 세는 훨쩍 넘긴 연세였다는 것만 기억되고 있다. 돌아가시기 몇 년전인지 기억이 안난다. 소리하는 기생 출신이었는지, 아님 모진 세파에 소리를 배워 시름을 잊으시려 했는지, 직접 말씀하신 적 없었고, 굳이 물어보지 못하였으나, 주변 어른들은 크게 문제삼아 시끄럽게 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입방아에 오르시는 일은 없었다. 몸가짐과 처신은 잘 하셨던 것이다. 증조부가 소리하는 기생을 첩으로 두려했다면, 다방면으로 능한 인재를 취했을 것이다. 부자가 그냥 미인만 탐하지 않았을 것같다. 재능을 높이 사 곁에 두고 싶은 욕심에 한 것이리라. 미모와 재능을 갖춘 여인네는 오늘날에도 세간에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가?

  그리고 그 분의 손녀는 나에게 고모 뻘이 되지만, 나를 포함한 사촌들은 고모라하지 않고 '아지매'라 불렀다. 집안에 내가 고모라고 부르는 큰고모와 작은고모도 계신다. 그러나 왜 '아지매'라 부르는 줄 모르고 그렇게 어릴 때부터 불렀다. 아지매는 항상 내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 큰아버지를 오빠라고 부르지만, 그분들은 아지매 이름 뒷자만 부른다. 아예 택호도 없었다.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안방은 본 부인이, 건너방은 첩이 살면서, 밤에 사랑방에서 '어험 아이고 배야 배 주물러라'식으로 부르면 둘 중 한 명이 사랑방으로 찾아가는 식이란다. 당연히 둘째 부인이 가는 것이다. ~사랑방이 괜히 사랑방인가 사랑을 하니 사랑방이지~

 

 

                       vII

 

  이제 대략적인 집 구조를 휙하니 돌아보니, 아직 기억이 몇가지 남아 있다. 대문 넘어 논 일부에 수박이 나고 있었고, 그곳에 나즈막한 원두막이 있는 것이다. 사방을 모기장으로 치고 한 여름밤 바깥 잠을 잔 기억이 어스럼푸레하다. 원두막 기둥에 남포불을 걸었던 할아버지 손이 졸리는 눈에서 희미해 진다.

 

 

                        VIII

 

  오래전 덕산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근처로 간 적이 있었다. 실은 그 당시 북면에 선산이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묘소에 어른들을 모시고 사촌들과 성묘를 갔을 때이다. 큰 고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 멀리서도 보였고, 길은 포장되었으나 여전히 그 길이었다. 중간에 있던 동네 우물도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논쪽 즉 길 오른쪽은 달랐다. 흙이 좋아 그러는가 벽돌공장이 들어 섰다. 옛날에 그 지역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토기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동네 주민들이 신고하지 않고 집에 가져가버린 것이 많았단다. 역시 벽돌 공장처럼, 양조장이 할아버지 집터에서 기와집을 대신하고 있었다. 청포도가 매달리는 조그만 우물은 사실은 샘이었는데, 뒷산의 물이 땅속으로 쓰며들은 후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큰 암석에 부딪혀 흐르지 못하고 쏟아 올라 만들어진 것이란다. 그 물이 연중 마르지 않아 가물어도 물을 쏟아 낸다. 그 물이 좋아 처음에는  술도가가 들어서고 나중에 양조장이 크게 들어 섰단다.

  증조부가 이룬 전답과 과수원과 넓은 토지들이 지금은 우리 집안에 없다. 3 대 거지없고 3 대 부자 없다는 말이 맞아 떨어진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시대 변화에 경제적 의식을 적절히 맞추지 못한 지주였던 것이다. 지금은 웃어른들이나 후손들이 나눠 먹을 땅 한 평도 없다.

 

 

                                 IX

 

  부산으로 떠나기 전 어린 시기에, 형은 나를 업고 다니며 돌봤다고 한다. 겨우 두 살 차이인데, 날 업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여 피딱지가 늘 붙어 있었단다. 그래서 요즘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주위 어른들이 그때 무릎을 많이 다쳐서 그렇다고 입에 올린다. 내가 조금 더 커서 뛰어 다닐 때는 주위에 또래가 없었는지 형만 따라 다녔단다. 그리고 부산으로 이사온 후 난 항상 형 뒤만 졸졸 따라 다니는 이상한 아이로 소문이 났다. 그리고, 말도 같은 경상도라고 해도 단어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형을 '아야'라 부르며 형을 찾아 따라 가면, 동네 아이들이 놀렸다. 그래도 왕따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야, 아야...'하며 형을 따라 다닌다고, '어디가 아프노?'하며 흉 보는 정도였다. 요즘도 며느리들 사이에 부르는 호칭이 '형님'이라는 말이 있지만, 대개 '성님'이라고 하듯이, 형을 부르는 말로 따로 '아야'라는 말이 있었나 보다. 아니면 어른들이 형을 부를 때 '아야'로 부르는 것을 그대로 따라서 불렀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말은 들으면서 배우는 것이니까.

 

주: 아야

친구끼리 격의없이 상대를 부르는 소리.

어른이 아이를 부르는 소리.

'얘야' 또는 '너는'이라는 뜻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낮은 사람한테 부르는 말.

'얘야'라고 부를 때 '아야'라고 한다 이 말을 할 때는 아플때 '아야'가 아니다. 

난 '아^야_'라고 소리를 낸 기억이 있다. 

 

 

 

                                X

                               

  이제 대략적인 내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나, 연관된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은 어렴풋하나마 그림으로 그리는 듯 글로 적어 보았고, 또 고향 집으로 가는 기행문으로 시간을 되돌려 보면서, 흑백 사진의 연속적 붙임을 해서 영상으로 돌리듯이 기억을 카메라에 담은 듯 했다. 아마 많은 기억들이 내 머리에서 나왔으나, 그 중 일부 혹은 대부분이 내가 만들어낸 것들인지도 모른다. 정말인지 아닌지,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으면 정말일 것이다. 사람도 흘러갔고, 집도 없어지고, 내가 길게 설명해도 알아 주는 사람없어 섭섭하네. 나만 기억하나? 다들 어릴적 기억이 전혀 없나?

  청포도 아래의 여름 멱은 혼자 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같이 청포도를 나눈 기억이 가물거린다.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아마 형님이 틀림없으리라.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까지의 평생 남을 추억은 덕산 모암 마을과 부산을 오가는 기억이다. 그 시기의 기억은 딱히 할아버지 댁 이외는 특이한 추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