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시기에 멀리 다니지 못하니,
서울 인근이나 성안의 여러 장소를
생각나는데로,
무작위로 주말에 다녔다.
그중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 기념관과
중구 신당동의 박정희 가옥을
찾아가 관람을 했었다.
물론, 하루만에 다녀간 것은 아니다.
여차저차하다가
각각 다른 날에 다녀가게 된 것이다.
I
김종필의 자서전의 내용으로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후,
'대권도전에 힘을 보태어 줄테니,
대통령이 되면 박정희 기념관을
만들어 달라'는요구를
김영삼에게 부탁했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김종필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김종필은 군사정권 때 고난을 격은 김영삼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곁에서 도왔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김영삼이 대통령이되자,
여러가지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고,
둘 사이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으며,
결국 갈라서게 되었는데,
그런 이유인지 약속했던 기념관은
흐지부지되어 없던 일이 되었다.
김종필은 나중에 다시 대권에 도전하는
김대중과 연합하면서,
김영삼 때처럼 기념관을 요구하였다.
김대중도 흔쾌히 약속했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김영삼과는 달리,
개인적으로는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면서
김종필의 요구대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서로 악연이 깊었으나,
김대중은 그렇게 화해를 했다.
대략적인 기념관의 설립 뒷이야기인데,
김종필은 박정희의 모든 기록이 좋든 나쁘든
역사의 한 부분으로 평가받고
기억되어 주길 바랐던 것 같았다.
김종필의 자서전을 읽다 보면,
박정희의 중대 결단 시점에는
김종필이 필연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성계가 혁명으로 조선을 세웠고,
정도전이 국가 체계를 만든 것처럼,
그 둘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기대어 나아갔다.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박정희의 공과는
김종필의 공과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어두운 물밑 작업은
스스로 나서서 하였고,
그 열매를
스스로 먹지 않았을 뿐이다.
김종필은 군사혁명이나 유신이
좀 더 나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억되길
바란 것같았다.
'김종필의 증언'이라는
자서전에는 대략적으로
박정희와 김종필에게는 혁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김종필은 유신은 원하지는 않았으나,
박정희에게는 유신은
멈출 수 없었던 과정이었으므로,
김종필은 마지 못해 협조한 상황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과정에 있었던 모든 업보는
홀로 남은 자기가 짐어져야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빚갚는 심정으로 대권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해의 의미로 기념관을 부탁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박정희의 기념관이
마무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기념관의 비밀 상자 안의 글에는
'내 후임자는 누구게?'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박정희의 최장기간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 있다.
그는 9년동안 박정희 곁에서
보좌했던 사람으로,
박정희의 정치나 행적 등의 기록물을 기반으로
회고록 '아, 박정희'를 출간했었다.
그 책 내용 중,
박정희가 자신의 후계자로
김종필을 언급한 내용이 있다.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나,
발언의 정황상, 표현 방법이
김종필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II
1961년 5월의 그 날
중구 신당동 박정희 집
새벽에 군복을 입은 채
거실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때 그가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부정하는 말도 있어 확실한 것은 없다.
그 시각 김종필은 혁명공약 전단지를 인쇄하는
인쇄소에 있었다.
공약 1.항이 '반공을 국시로 한다'였다.
전문은 김종필이 집필하였는데,
거사 전에 공약을 읽어 본 박정희가
'이건 나 때문에 적었군.'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 때문에
혁명의 오해를 없애기 위해
첫 머리에 쓴 글이라는 것이다.
오늘 그 신당동 박정희 가옥을
찾아갔었다.
일요일 초복에 점심 약속으로 외출했다가
점심 먹고, 생각난 김에
발걸음하게 된 것이다.
아침부터 흐리고 가끔 흩날리는 빗방울 때문에
멀리는 가지 못하고,
간단히 다녀 올 수 있는 곳을 생각하다가,
떠올린 곳이다.
철문은 잠겨있지 않고 조금 열려 있었다.
게시된 관람 시간표로는
관람시간인데, 문 안쪽에는 조용한 것이
아무도 없는듯 했다.
살짝 문을 밀고 들어 가니,
마당 저편에 박정희 대통령 부부사진이
실물 크기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문옆 사무실에서
웬 노인이 나오면서
관람을 안내해 주었다.
이 건물은 문화재이고 자신이 관리인으로
여기 근무한다는 것이다.
마침 방문자는 나 혼자여서,
편하게 집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관리인의 설명으로는...
' 이 집은 1920년대 일제시대 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 조선식 건물들은 사랑채, 안채, 뒷간...화장실은 좀 떨어진 곳에, 대략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집은 열린 구조인 마루대신 폐쇄적인 거실 개념으로 이루어 진 형태이며, 화장실이 실내로 들어와 있는 구조로서, 일본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최초 민간 건축물로, 건축사적인 의미가 있어 문화재로 지정된 것입니다.
단지 박정희 가옥이라는 이유로 문화재가 된 것이 아니라, 여기 일대에는 1920년대 그 당시 이런 신식 건물을 많이 지어 분양했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차츰 주변이 개발되면서 사라지고, 이 건물만 유일하게 남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박정희 가옥이라는 이유 때문에 남아 보존이 된 것도 맞는 말입니다.'
거실에 있는 기록 사진을 보면,
가구나 거실 벽에 걸려있는
액자의 그림이나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복원 재현한 거실에도
사진과 똑같이 가구와
가구 위의 석고상, 시계,
거실벽의 그 액자들을
사진과 같이 배치해 놓고 있었다.
방과 가구는 특별한 것이 없었으나,
그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는
꽤나 넓은 집이었을 것이다.
대지 80평에 건평 48평(?...에고 잊어 먹었다.)
단독 주택으로,
10.26이후 세 남매가 잠시
기거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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