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코로나와 봄이 있는 주말 II

夢乭 2021. 5. 3. 14:17

 

 

 

 

어제 토요일은 날씨가 나들이하기에는 부적합했다. 비도 오고, 춥기도 하고...
그래도 집에서 빈둥거리며 있기는 싫고...
마침 며칠전에 메일로 온 이상한 전시회가 떠올랐다. SeMA벙커의 전시회 소식이었다.

오래전에 우연히 서울시 소식지를 메일로 받는 것에 가입을 했었다. 그후 쓸데없는 소식지들이 날라왔는데, 이번에 온 메일은 전시회 소식이었는데, 내용 중 전시회 장소가 특이했다.

아주 오래전에 여의도 버스 정류소 정비 작업 도중에 지하벙커가 발견되었고, 군사정권시절 여의도 광장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있는 날에는 VIP가 서는 단상 바로 아래 자리에 위치하는 것으로, 행사시 비밀 대기실로 추정된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그 벙커가 전시실로 개축되어 무료관람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무엇이 전시되었던 벙커를 구경하고 싶어졌다. 전철과 시내버스 환승으로 현장에 도착했으나, 네비게이션의 위치 표시에 맞는 입구를 찾기 어려워 도로 주위를 찾아 다니다가, 인도 한가운데 있는 엘리베이트로 된 출입구를 찾았다. 전시회 포스트가 없었다면 전시회입구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원래 출입구는 현재 도로 아래여서 근처 인도에 새로 출입구를 내어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것이었다.

엘리베이트를 타고 내려가니, 실내에는 얼키설키 내부 구조물이 서 있고 낡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목은 일제 수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는 취지의 사진 전시회이나, 대부분의 사진은 내가 어렸을 때 찍은 국민학교 졸업 사진이나,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사진관에서 폼을 잡으며 찍은 기념 사진 형태와 다르지 않았다. 주로 일제시대의 공장이나 탄광에서 찍은 노동자들의 단체 기념 사진과 개인의 기념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사진들로 가득찬 전시회로는 일제 수탈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 지지 않았다. 그래서 별 감흥이 없었고, 한 구석에 복원된 한 탁자와 여러개의 쇼파가 있는 공간이 눈에 들어 왔다.

벙커가 발견된 당시의 사진과 설명이 벽면에 붙어 있었고, 각종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공간 외에는 전시실로 개조되어 알 수 없지만, 복원된 공간만 가지고는 고급스런 비밀 공간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차지철이 주도한 시설 공사라는 설명이 벽에 걸려 있었다.

조그만한 숨겨진 공간이 우연히 드러났던 것 뿐이었다. 군사 독재자의 비밀공간이라고 호들갑떨던 서울 시장은 시청에 비밀방을 만들어 침대를 놓고, 때때로 비서를 불러...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있지만, 고놈이 고놈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김형욱이 군사정권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그렇게 욕을 해도, 결국에는 '그는 그래도 위대한 독재자...'라는 말을 회고록 작성시 공저자에게 말하곤 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에 인권, 페미니즘, 여성권익 신장의 대명사로 시민운동과 노동자 중심의 민주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 성추행으로 만인의 지탄을 받는 흑역사가 대조적으로 내게 다가 온다.

각각 다른 의미의 비밀 공간을 가진 자들의 타살과 자살...

"배꼽아래는 건들지마라"며, 야당 정적의 여성 문제도 끝까지 묻어 주었던 권력자. VS 여성 인권 신장을 부르짖으면서, 독재자의 여성 문제를 신랄히 비판하던 시민민주운동가의 성추행.

얼마나 가식적인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워 세상에 돌을 던지던 행위와는 달리 추악한 내면을 가식이라는 벙커에 숨겨 왔던 것이다.

가식과 벙커.
마음을 숨기는 가식. vs 몸을 숨기는 벙커.

SeMA벙커를 나오며 머리를 스치는 생각으로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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