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단상들

엄마와 딸

夢乭 2021. 3. 12. 02:06


접수된 환자 이름을 보니 낮설다.
그런데 차트는 2주 전에 진료를 본 것으로 나와 있다. 요즘 기억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확연하다.
그래서 차트에 진료 기록을 시시콜콜한 것도 써 넣어서 다음 진료 때 기억을 더듬을 여지를 주고자 하기도 하고, 초진시 자세한 증상을 기록해 놓고 재진시 재점검하면 질환 환기가 되는데, 이는 재진시 질환 파악과 치료에 도움이 된다.
차트 기록 상의 무릎 통증, 왼다리 저림, MRI 영상자료, 지난번 치료, 동행한 보호자...
기억이 날듯...
환자는 보호자의 엄마다.
60중반을 넘은 환자와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딸의 나이는... 30초중반쯤...
요즘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져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보호자와 함께 들어오는 경우가 없잖아 있어도 흔한 경우가 아니라서 희미하게 기억이 떠 오른다.
..전에 MRI사진에서 물혹이 신경을 눌러 왼다리가 저리다고 하신 분이지요? 그날 신경치료 후 경과는 어떤는지요. 좀 나아졌나요?..
..저림은 많이 좋아졌고, 아예 안저려요. 그런데 이번에는 오른쪽 무릎이 많이 아파요..
..아, 오늘은 다른쪽 무릎 때문에 오셨다구요?..
지난 질환 자료를 참조하면서 무릎관절에 대해 문진과 영상자료 점검, 촉진, 손상과거력 등등을 기록해 나갔다.
전형적인 무릎 퇴행성 질환이다. 쉽게 말해 무릎관절염이면서 하루 3~4시간 걷기운동으로 하지 근육통도 동반된 상황이었다.
..당분간 걷는 것은 피하세요. 현재 무릎에 과도한 부하가 걸려 통증이 생긴 것이니까, 부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해요. 지금 환자분이 다리 운동을 하려면 체중이 무릎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자세나 운동기구 등을 사용하도록하세요. 걷기를 한다면 수영장에서 걷기를 하면 부력때문에 무릎에 체중부하가 줄어 무릎을 보호하면서 물의 저항으로 걸을 때 근육을 단련하는 효과도 있지요. 실내자전거도 같아요. 연세드신 분들이 많이 해요. 그리고 사우나를 자주 해 보세요. 근육이완도 잘되고..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우나 못가요. 수영장도..
..그럼, 집에서 욕조에 더운 물 받아서 몸 데우세요..
..무릎을 많이 사용해서 그렇지요? 그봐 엄마... 이제 쫌 무리하게 걷기운동 같은 거 이제 하지마. 선생님 저희 엄마 고집은 엄청 쎄서 여간해선 제 말 안들어요. 한번 나가면 걷기운동하는데 서너 시간은 예사예요. 말려도 안되요. 이 참에 선생님이 저희 엄마 좀 운동 줄이거나, 안 아파질 때까지 운동하지 말게 좀 설득해 주세요..
옆에 가만히 있던 딸이 엄마를 나무라듯이 닥달하더니, 내게 질환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엄마를 챙기는 딸의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난 좀 더 간략하게 첨가적으로 설명하고, 간호사에게 신경차단술을 준비시켰다.
..보호자분은 이제 밖에서 기다려주시고, 환자분은 주사 준비하는 동안 잠시 여기 앉아 기다리세요..
그후 모니터를 보면서 차트를 작성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환자 얼굴을 스치듯이 보게 되었는데, 마스크 위의 두눈이 .... 날 쳐다보는 눈이...
뭔가 찌든 듯한, 슬픈, 울고 싶은, 그리고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환자는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힘들게 하소연 하듯이 말한다.
..딸이 나가고 없어서 하는 말인데요. 내가 요즘 많이 힘들어요. 나도 예전에 직장생활을 했었어요. 사회생활도 했었지요. 그런데, 요즘 딸 집에서 손주 돌보면서 살림도 해주고 지내는데요... 일이 끝도 없어요. 애 보다가, 청소하다가, 때되면 밥해야지, 밥멕여야지, 빨래도 해야지... 돌아서면 일이예요... 다리도 아프고, 몸이 너무 힘들어요. 그놈의 살림살이가 너무 힘들어요. 딸네는 맞벌이면서 떨어져 있고, 주말부부예요. 이 나이에 애보고 살림하려니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요즘 운동 핑게로 하루 서너 시간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바람도 좀 쐬고, 강물도 좀 보고, 그냥 쉬고 싶기도 하고, 숨통이 틔어야... 꽉~ 막힌 것같아서..
단숨에 말하고는 한숨을 쉰다.
..그래서 하루 서너시간 걷게 되었군요. ㅎㅎ. 요즘 손주 돌보다가, 특히 '외손주' 돌보다가 팔다리 허리 골병들어 병원 오시는 분들 많으세요..

병의 원인은 엄마를 알뜰하게 챙기는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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